조선 왕위 계승의 갈등과 정치적 긴장 (경종과 영조의 즉위 과정)
조선 왕조는 유교적 명분을 중시한 국가였지만, 왕위 계승 과정에서는 종종 정치적 갈등과 암투가 발생했다. 특히 경종(景宗)과 영조(英祖)의 즉위 과정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숙종(肅宗) 말년의 정치 상황, 경종의 즉위와 단명(短命), 그리고 영조의 왕위 계승 과정을 중심으로 왕권 계승이 가져온 정치적 변화와 갈등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숙종의 후계 구도와 정치적 갈등
숙종(재위 1674~1720)은 조선 후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군주로, 남인(南人), 서인(西人), 노론(老論), 소론(少論) 등의 붕당을 교체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는 환국(換局) 정책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국 정치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숙종은 후궁 장희빈(張禧嬪) 소생의 아들인 경종(이윤, 李昀)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이는 서인 계열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숙종이 장희빈을 사사(賜死)한 후, 세자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반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노론(老論)은 서인의 강경파로, 숙빈 최씨(淑嬪 崔氏) 소생의 연잉군(延礽君, 후일의 영조)을 차기 왕으로 밀었다. 경종이 병약하여 오래 재위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세제(世弟)로 연잉군을 미리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론(少論)은 서인의 온건파로, 경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다. 이들은 장희빈 사후에도 경종을 보호하며 그가 정통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숙종은 생전에 경종을 세자로 확정했으나, 노론이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밀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펼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2. 경종의 즉위와 단명
숙종이 1720년 6월 승하하자, 경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노론은 즉위 직후부터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를 '세제 책봉 문제'라고 하며, 경종 즉위 초반의 가장 큰 정치적 논란이었다. 경종과 소론은 노론의 이러한 주장을 반역 행위로 간주했고, 결국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년)라는 대규모 숙청이 발생했다. 신임사화에서 소론이 권력을 장악하며, 노론의 핵심 인사들이 유배되거나 처형당했다.
경종은 즉위 전부터 병약했으며, 즉위 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1724년에는 심각한 병을 앓으면서도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 측근을 통해 정치를 주도했다. 하지만 노론은 경종의 건강 악화를 기회로 삼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연잉군의 즉위를 준비했다.
1724년 10월,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급작스럽게 승하했다. 경종의 사망 원인을 두고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게장과 감을 먹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당시 경종은 병약한 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좋아하던 게장과 감을 먹었다. 그러나 게장은 상하기 쉬운 음식이었고, 감은 소화에 부담을 줄 수 있었다. 실제로 경종은 이 음식을 먹은 후 급격한 복통과 고열을 호소하며 상태가 나빠졌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종이 사망하기 직전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으며, 노론은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노론이 올린 보약을 먹은 후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경종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경종이 사망한 후 영조가 급히 즉위하고, 노론이 정국을 장악한 점도 의혹을 키웠다. 일부 학자들은 경종이 기존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노론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견해 또한 여전히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경종의 죽음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3. 영조의 즉위와 탕평 정치
경종이 사망하자, 연잉군이 즉위하여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되었다. 그는 경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과 남인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영조는 즉위 후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붕당 간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나, 정치적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영조 즉위 후에도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특히, 소론 강경파는 경종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며 영조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이에 대해 영조는 즉위 초반에는 노론을 중용했지만, 이후에는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영조는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고자 탕평비(蕩平碑)를 세우고, 산림(山林) 제도를 폐지하며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강화했다. 또한, 노론과 소론의 극단적인 대립을 방지하기 위해 사형을 신중하게 집행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4. 경종과 영조 즉위의 역사적 의미
경종과 영조의 즉위 과정은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적인 갈등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붕당 정치의 극단적인 대립, 세제 책봉 문제,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정쟁과 음모는 이후 조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의 갈등을 딛고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다. 그의 개혁은 정조(正祖) 시기의 개혁 정치로 이어지며 조선 후기 왕권 강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경종과 영조의 즉위 과정은 단순한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와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결론
경종과 영조의 즉위 과정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경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소론의 보호를 받았지만, 노론의 강한 견제로 인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즉위했으나, 붕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해야 했다. 결국, 조선 후기 왕위 계승의 혼란은 단순한 정통성 문제를 넘어 정치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 본질이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조선의 정치 구조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